“아직도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이란 나라가 망하기 직전, 홀로 바다를 지키던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의 모함으로 1957년 2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을 죽이라는 간신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그를 살리라는 신구차伸救箚 덕분에 4월 1일 겨우 목숨을 건져 풀려났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전쟁터로 계급없이 백의종군白衣從軍했다. 7월 15일 원균의 패전과 전사로 수군이 무너지면서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조정에서 육전을 독려하자 바로 이 ‘열두 척尙有十二’ 장계를 올린 것이다.
이순신은 이어 9월 16일 명량해전에 나서 장병에게 ‘필사즉생必死則生(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 것), 필생즉사必生則死(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을 것)’를 외치며 전쟁을 독려해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장계가 사실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앞서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은 대패했고 수병들은 다 흩어져 버렸다. 가진 것 없는 이순신에게는 한양 조정에서 내려와야 할 군수물자 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한 이순신. 실성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수백 척 왜선倭船을 앞에 둔 상황에서 임금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장계를 올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늘 굳게 믿는 것이 있었다.
조선은 과학으로 창건創建된 나라이다. 신라와 고려가 첨성대瞻星臺로 하늘의 조화를 살펴 백성을 다스렸듯이 조선도 하늘을 과학의 눈으로 관찰했다. 특히 태조 4년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보라! 조선은 또한 백성을 위해 과학정책科學政策을 편 나라였다. 세종의 측우기測雨器와 앙부일귀仰釜日晷[1]를 보라! 물론 이는 일부일 뿐이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중시된 과학정책과 과학기술의 힘은 거북선의 발명과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의 제작 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무적無敵의 투혼鬪魂이 되어 결국 승리하지 않았던가?
우리 선조는 왕조의 변천에도 특히 하늘을 관찰한 조상들의 예리하고 뛰어난 천문학 궁구窮究의 열정,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1천년 전 신라의 첨성대와 600년 전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측우기測雨器
[2]에 나타난 자연현상自然現象과 천문天文·우주宇宙로 향한 선조들의 과학정신은 오늘날 한국이 7대 우주탐사 강국으로 도약하는 역사 자산의 바탕이 되고 있으니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 이제 나에게 왜 〈과학문화진흥원〉을 만들었느냐고 물어봐 주길 바란다. 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숱한 별들에 푹 빠져 평생을 보냈다. 늘 하늘을 살피고 하늘에 매달려 삶의 의문에 대해 하늘과 별에서 해법을 구하려 했기에 나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 겨레 과학의 위대함을 발굴하여 지혜의 원천으로 삼고자 한다.”
[1]천문학 용어에는 天球, 星球, 日球, 地球, 月球, 圓球, 小球, 大球, 半球, 全球, 氣球, 日球儀등이 있어서 둥굴다는 형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형체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때 한글로는 모두 “천구‘, ’일구‘, ’지구‘, ’월구‘ 등으로 구(球)이다, 따라서 한글로 ’구‘를 쓰면 둥굴다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해시계는 ’日球‘가 아닌 ’日晷‘로서 한글로는 오랫동안 ’일귀‘라고 써 왔었는데, 천문학을 모른 인문학자가 발음하기 쉽다고 ’일구‘로 바꿔버렸다. 사전에는 ’晷‘를 ’구‘ 보다 ’귀‘라고 쓰고 있다. 또한 해시계의 물리적 특성을 설명하는 천문학자들은, 해시계의 ’晷面‘, ’晷體‘, ’晷類‘, ’晷狀‘, ’半晷‘ 등을 한글로 표기할 때는 ’귀면‘, ’귀체‘, ’귀류‘, ’귀상‘, ’반귀‘로 쓰지 않으면 ’球面‘, ’球體‘, ’球類‘, ’球狀‘, ’半球‘ 등과 구별 지을 수가 없다.
[2]현재 교과서에는 ‘雨量計’이다. 이 용어는 ‘測雨器’를 알지 못한 일본기상학자들이 rain guage를 ‘雨量計’라고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이것을 ‘測雨器’의 역사를 배우지 못한 해방 직후의 한국학자들이 알지 못해서 지금까지 쓰고있는 것이다.